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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KAIST 석좌교수 “한국의 스티브 잡스 키우는게 내 할 일”

처음부터 그를 존경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프로그래머로 변신하다니…. 그 독특한 삶의 궤적이 중학생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어른이 되고 기자가 된 뒤에는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에 긴장하고 상기된 얼굴을 하던 숙맥 같은 최고경영자(CEO)였다.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의 모습은 닳고 닳은 비즈니스 판의 냉혹한 승부사들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 다름이 나를 더욱 매혹시켰다.

지금은 그를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 됐다. 5년 전만 해도 '안철수'라는 이름은 '기업가'였고 정보기술(IT) 업계의 '벤처 신화'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벤처업계에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골목대장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뒤 그는 존경할 사람이 드문 이 시대에 존경을 받는 유명 인사가 돼 있었다. 그는 이제 골목대장이 아니라 사령관이다.

2007년 우연한 기회로 그의 삶에 대한 책을 쓰게 됐다. 내 첫 저서였다. 책으로 묶인 것을 읽고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때 '안 박사'(안 교수, 안 의장 등은 영 어색해서 그렇게 부른다. 그도 좋다고 했다)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책은 머리로 낳은 자식입니다. 아무리 모자란 점이 있어도 결국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난해에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책을 썼다. 새 책에 서명을 해서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안철수연구소 사무실로 찾아갔다.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맞아준 안 박사에게 나는 그저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몇 개 던졌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답변을 길게 해줬다. 인터뷰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니었는데, 대화를 끝내고 보니 인터뷰처럼 돼 버렸다.
우문현답을 독자들께 소개하고 싶었다. 그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동아일보 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약간 늦게 도착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키우다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돼 후배 기업가를 돕겠다고 했다. 그런데 교수가 됐다. 좀 실망스럽다. 기업인을 키우는 걸 포기한 것인가.

"그때 벤처캐피탈리스트가 아니면 교육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육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인을 키우는 걸 포기한 건 아니다. 안철수연구소에서 '고슴도치플러스'라는 사내 벤처를 운영한다. 이 회사는 조직과 구성은 그냥 사내 팀인데 기존 업무에선 완전히 손을 떼고 다른 일을 한다. 고슴도치플러스의 모든 중요한 결정에 나도 함께 참여해 논의한다. 그동안 한국의 벤처기업인들이 실패의 경험을 배우지 않고 무조건 해보는 식으로 사업을 한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은 성공률만 떨어뜨린다. 난 그런 의미에서 사내 벤처를 키우며 그들에게 내가 실패한 경험을 알려준다. 초기에 겪는 실수는 사실 책에서 배운 지식대로만 해도 겪을 필요 없는 사소한 게 대부분이다. 이론이 곧 현실에 적용되니까. 그런데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고 지레 생각하고 배운 지식과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바로잡아주려는 것이다."

―벤처캐피탈리스트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거라고 말했었는데….

"벤처캐피탈을 하려고 했더니 많은 분들께서 한국에는 벤처에 투자할 '돈'은 있는데 '투자할 벤처기업'이 없다고 하시더라. 기업이 없는데 돈만 있으면 어디에 투자하겠나. 그래서 벤처캐피탈보다 기업인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매주 한 번씩 내가 있는 대전(카이스트)과 서울(안철수연구소)을 연결해 고슴도치플러스와 화상회의를 한다. 두세 가지 사내 벤처를 더 만들려고 진행 중이다. 카이스트에서 기업가정신 과목을 담당한 것도 이런 이유다."

―카이스트 수업이 인기가 좋다고 들었다.

"그렇다. 나도 놀랐다. 아마도 토론식 수업과 다양한 방식 덕분일 거다. 전통적인 방식의 강의를 하는 교수님들과 내 강의가 차이가 좀 있으니까. 예를 들면 난 내 강의에서 꼭 스티브 잡스 애플 CEO의 스탠포드대 졸업식 축사를 들려준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고도 다시 복귀해 그 회사를 1위로 만드는 기업가정신에 대해 토론하는 식이다. 그랬더니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갑자기 창업을 하겠다고 진로를 바꾸더라. 처음엔 겁도 났다. '내가 뭔데 저들의 인생을 바꾸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리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방향을 진심으로 학생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내 학생들이 내 진심에 영향을 받아 변화해 준 것이다. 이건 고마워 할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난 내가 한국 사회가 더 좋은 사회로 바뀌려면 이렇게 했으면 한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그들이 그렇게 바뀐다면 한국 사회도 좋아질 거라 믿는다."

―안철수연구소에서 CLO(Chief Learning Officer)라는 직함도 갖고 있다던데.

"교재도 내가 만들고 강의도 내가 하는 일종의 사내대학이다. 모든 사원들을 다 불러 모아 1년에 한 번 3박4일 정도 집중 교육하는 코스다. 지난해 8월에는 '전략'을 주제로 사내대학을 열었다. 기업이 얘기하는 전략이란 건 일반인들이 쓰는 전략이란 말과 다른 개념인데 이걸 전혀 모르고 혼동해 사용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그래서 기본적인 전략 개념에 대해 강의했다. 2010년에는 마케팅을 다뤄볼 예정이다. 회사원이라면 알아야 할 기본 개념이니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전원을 껐는데 안 교수가 이를 보더니 한국과 미국의 비즈니스 방식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기자의 전화기는 애플의 '아이폰'이다.

"아이폰은 단순히 경쟁력 있는 외국 제품 하나가 들어온 게 아니라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가 미국의 비즈니스 문화와 정면충돌한 큰 사건이다. 내가 알고 배워왔던 미국의 비즈니스 문화는 수평 네트워크다(안철수 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에서 직접 일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선 작은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주변에 몰려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한다. 대기업은 이런 작은 기업들의 모험과 혁신에서 미래의 성장 동력을 찾고, 이들이 더 모험적이고 혁신적인 기술에 도전할 수 있도록 이들의 큰 고객이 되어준다. 이 과정에서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이 대기업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와 많이 다른 것 같다.

"한국의 비즈니스 문화는 수직적 문화다. 대기업이 하청기업을 거느리고 하청기업에서 가치를 쥐어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한다. 그동안의 압축 성장에는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론 어려울 것 같다. 그동안 아이폰이 들어올 수 없게 막고 또 막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소프트웨어 업체의 살 길을 만들어주며 더 큰 돈을 벌어들이는 애플과 같은 사업 모델을 국내 대기업은 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문화가 갑자기 '쾅' 하고 정면충돌해 버렸다. 결국 이건 한국 기업에게 엄청난 충격이 될 것이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성공한 건 수많은 게임업체가 소니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게임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한국엔 이런 모델이 없고 뭐든 한국 대기업이 다 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기업에서 의사 결정하는 높은 분들이 워낙 수직 구조에만 익숙해서 수평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실까 걱정이다."

● 계속 기업인을 키울 것

―활동이 많다보니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요새 부쩍 그런 말 많지만 절대 아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걱정이다. 지금까지는 선거 시즌에 외국에 나갈 일이 많아서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그런데 2010년 6월은 학기 중이라 외국도 못 나가는데 하필 딱 선거 시즌이다. 어떻게 정치 입문 권유를 뿌리쳐야 권하시는 분들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그래도 특정 정당을 편들어 본 적은 없다. 지금 대통령직속위원회 활동과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함께 하는 걸 보라. 난 정치적으로 편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후 책은 안 쓰나.

"새 책을 쓰고 있다. 5년 만이다. 그런데 바쁘다보니 진도가 도무지 나가질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마무리할 계획이다."

―TV 프로그램인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사실이 화제가 됐다.

"그게 참 재미있다. 나를 아는 분들이 방송을 보고 나서 늘 하던 얘기를 지겹게 또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게 인기다. 내가 깨달은 건 그동안 나나 내 주위 사람들이 IT 업계라는 좁은 우물 안에만 갇혀 있었던 거다."

―(기업인으로서) 좋은 역할을 하셨다는 평가가 많다.

"기업인의 역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요즘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하면서 강조하는 분야가 커뮤니케이션이다. 기업 내부와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역할도 늘고 있다. 나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기업인들도 그런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 주셨으면 싶다."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다음 약속이 있다는데 얘기가 그치질 않았다. 옆에서 안철수연구소 박근우 홍보팀장이 눈짓을 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는 걸 알고 있고 안 박사 자신도 다음 약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쉽지만 악수를 하고 일어섰다.

안 박사는 '무릎팍 도사' 촬영 때에도 한 시간 방영 분량을 찍기 위해 네 시간을 쉼 없이 녹화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게 인생의 전부인. 이렇게 최선을 다한 순간들이 쌓여 의사가 되고, 프로그래머가 되고, 사장이 되고, 교수가 됐다.

그 모든 게 그냥 '안철수'였다.


▣  철가방 아저씨 - etc - 2011. 9. 28. 13:07

매달 70만원 벌며 기부… 세상을 떠난 후, 세상을 부끄럽게 하다
짜장면 배달원 김우수씨의 마지막 흔적
그의 책상, 외롭지 않았던… 후원했던 아이들 3명의 사진
액자 속에 덩그러니… 서랍엔 보물같은 아이들 편지
그의 옷, 부끄러움 없었던… 대통령 초청때도 배달복 입어 "평소의 모습이 제일 떳떳해"
그의 일상, 외로움과 싸웠던… 휴대폰엔 저장된 번호 없어, 영화 관람이 유일한 취미

한달 70만원 벌이의 변두리 중국집 배달부. 창문도 없는 4.95㎡(약 1.5평)짜리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들을 돕던 후원자. 7세 때 고아원에 버려져 지난 24일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이틀간 아무도 찾지 않은 병실에서 쓸쓸하게 숨진 사람. 김우수(54)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중국집 '동보성'은 김씨가 지난 5년간 주말마다 배달부로 일한 곳이다.

가게는 33㎡(약 10평) 크기에 불과하다. 주인 이금단(45)씨는 "김씨 아저씨는 출근 시각보다 한 시간 일찍 가게에 나와 영업 준비를 하던 사람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쪽방에 몸 누이고… 책상엔 후원했던 아이들 사진이… 김우수씨가 살던 서울 논현동의 고시원방. 창문도, 화장실도 없는 이 방은 1인용 침대와 간이 책상과 옷장 하나가 들어갈 공간이 전부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성실했던 김씨는 유품이 된 지갑 속에 5000원권 3장과 1000원권 45장을 남겼다. 다음 날 배달에 필요한 거스름돈으로 쓰려고 미리 준비해 놓은 돈이었다. 김씨는 주말마다 오전 8시부터 13시간 배달일을 하고, 오후 9시 일당 9만원을 받아 마을버스를 타고 아무도 없는 고시원 쪽방으로 돌아갔다.

월세 25만원 고시원 쪽방

동보성에서 마을버스 열다섯 정거장 떨어진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고시원 구석 방. 김씨는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서 4년 전부터 월세 25만원을 내고 살았다.

27일 주인을 잃은 방 한쪽에 놓인 책상 위에는 그가 후원해 온 아동 3명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가 놓여 있었다. 책상 서랍에는 후원했거나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받은 감사편지들이 보물처럼 놓여 있었다. "용돈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매일 노는 것은 아니에요." "보내주신 14.25달러로 가족을 위한 옷과 농작물을 구입했습니다. 항상 후원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에티오피아 후원아동)" "후원자님 언제나 저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감사드려요."

김우수씨의 책상에는 후원하던 아이들로부터 받은 편지가 보관돼 있었다. 철자법도 틀린 편지들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그의 외로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는 이 사연들을 몇 번이나 읽었을까.
김씨는 158㎝, 55㎏의 작은 체격이었고, 웃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2~3벌뿐인 옷은 언제나 깨끗이 빨아서 입었다.

동보성 주인 이씨는 "2009년 연말에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들을 대통령이 초청한 적이 있어요. 다들 잘 차려입고 가라고 했지만, '평소 내 모습이 제일 떳떳하다'면서 배달 일할 때 입는 검은색 옷을 입고 갔어요. 꾸미지 않는 사람이었어요"라고 했다. 고시원 총무 박모(34)씨는 "월세도 한 번 밀린 적 없고, TV를 볼 때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볼륨을 최대한 줄여서 보던 사람"이라고 김씨를 기억했다.

하루 담배 두 갑 피우던 사람이…

김씨는 지난 2006년부터 매달 5만~10만원을 어린이재단을 통해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데 썼다. 하루에 담배 2갑을 피우고, 소주 2병을 마셨지만, 아이들 후원을 시작하면서 "술, 담배 살 돈이면 1명 더 도울 수 있다"며 모두 끊었다.

대통령 초청에도… "평소 내 모습으로"… 김우수(오른쪽 두번째)씨는 지난 2009년 12월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으로 선정돼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았다. 주변에서는 “대통령 만나는데 잘 차려입고 가라”고 했지만, 그는 배달일을 할 때 입는 검은색 옷에 모자를 쓰고 갔다. 그는 “평소의 내 모습이 제일 떳떳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이재단 관계자는 "고인이 형편이 좋을 때는 국내·외 아동 5명을 후원하다가 최근에는 생활이 어려워져 1명으로 줄였지만, 한 번도 후원금이 밀린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나머지 돈으로는 매달 20만원씩 납입하는 연금보험과, 12만1000원을 붓는 종신보험을 들었다. 종신보험 4000만원은 어린이재단이 받도록 해놨다. 사후 장기 기증도 서약했다.

동료 배달원 황대식(31)씨는 "김씨 아저씨는 언제나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살게 된 건 후원아동 덕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배달일을 하지 않는 평일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신문 경제면을 보면서 전 재산인 300만원어치 주식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는 조조영화를 혼자서 보는 것이 낙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영화를 봤다.

영화관을 나서면서는 2000원짜리 스포츠복권을 1장 사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집 동료들은 "'당첨금액이 큰 로또를 사지 그러느냐'고 말하면, '내 운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을 것 같다'며 웃곤 했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자전거로 한강변을 달렸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의정부, 속초 등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집 근처 풍물시장에서 혼자 쇼핑하면서 1만~2만원짜리 운동화, 옷가지를 샀다. 동료 박산(37)씨는 "'좋은 물건 샀다'며 새 시계를 찬 팔목을 불쑥 내밀던 아이같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고아원에 버려졌던 인생인데

가족이 없는 김씨의 시신은 장례 절차를 밟지 못하고 27일까지도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 영안실에 있다. 김씨가 일했던 중국집 동보성 이금단 사장은 "평생 외롭게 산 사람인데 죽어서까지 가족 없는 설움을 받는다"면서 눈가를 훔쳤다. 어린이재단이 김씨의 장례를 치르기로 해 28일 빈소가 서울 대림동 서울복지병원에 마련된다.

그는 평생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단 하나의 단축 번호도 저장돼 있지 않았다. 단 한 통의 문자 메시지도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김씨는 미혼모의 아이였고, 7세에 고아원에 맡겨졌다.

12세 때 고아원을 뛰쳐나온 탓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구걸, 양조장 허드렛일, 시장 지게꾼 등 어렵고 힘든 생활을 했다고 주변에서 말했다. 소년원도 몇 차례 다녀왔고, 지난 2005년에는 한 술집에서 "나를 무시하느냐"며 불을 지르려다 1년 6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자포자기했던 김씨는 감방 안에서 어린이재단이 발간한 잡지 '사과나무'를 읽고 인생을 새로 살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은 "잡지에서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의 사연을 읽고 며칠을 울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돕고 싶은 아이들이 생기자 제대로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제2의 인생, 그의 마지막 5년은 세상 누구보다 뜨거웠다. 쪽방 구석 사진 속의 그가 기자에게 물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shift + f10

CMD창이 오픈이 된다.

net user administrator /active : yes

taskkill /f / im msoobe.exe



▣  공동주택 - etc - 2011. 5. 15. 14:37

▣  쿠팡 - etc - 2011. 3. 9. 22:49
top
:

▣  한글 서체와 일본 서체 - etc - 2011. 3. 9. 21:58
http://bird4you.blog.me/120056949603

오늘 버찌형이 재미있고 인터렉티브한 사이트를 보내줬다.


http://fontpark.morisawa.co.jp/



이 폰트파크란 사이트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유저들이 여러가지 폰트를 가지고 그림을 만들 수 있는 웹사이트다.

방문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만든 그림의 과정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별점을 주는 형태의 소극적 참여도 가능하다.



아래는 다양한 사람들이 폰트를 가지고 직접 만든 그림들.



<출처 : http://fontpark.morisawa.co.jp/ >




이 사이트에서는 이렇게 리스트 형태로 재미있어 보이는 그림을 골라서 볼 수도 있다.




<출처 : http://fontpark.morisawa.co.jp/ >






폰트로 곰돌이 만드는 건 압권이었다. 나는 별 다섯을 줬다.


 

< 곰돌이가 완성 되었고 별점을 주는 창이 막 뜨려고 하는 찰나의 캡쳐,  출처 : http://fontpark.morisawa.co.jp/ >

 



그냥 재미있게 보고 일단 즐겨찾기만 해뒀는데, 버찌형의 한마디.

"이거 일본의 폰트 회사에서 마케팅용으로 만든 페이지래"

순간 눈이 번쩍 떠지며 다시 보게 되었다.

똑같은 웹사이트라도 이런 사이트를 폰트회사의 마케팅 용도로 만든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깜짝 놀랄만한 참신한 기획 - 획기적인 개발이다.


사이트를 찾아 읽어보니

'모리사와' 라는 아아아주 오래된 일본의 서체 개발 회사에서

'유고 나카무라' 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인터렉티브한 디자이너에게 의뢰한 '폰트파크' 라는 인터렉티브 작품이었다.

(유고 나카무라의 가장 최근작 중 하나가 5초마다 예쁜 아가씨들의 재밌는 액숀이 나오는 유니클로 화면보호기다)


<유고 나카무라의 유니클로 화면보호기, 출처 : http://www.uniqlo.co.kr/ >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모리사와'는 2003년에 이미 MIT 미디어랩의 존 마에다(John Maeda)가 '폰트파크'의 첫 번째 버전을 제작했었고

이번에 두 번째 버전인 것이었다.


존 마에다 - 유고 나카무라.

세계 최고의 인터렉티비티를 지닌 디자이너들. (둘 다 일본사람 같지만 존 마에다는 시애틀에서 태어난 엄연한 미국인이다)

이런 디자이너들이 만든 것이 바로 모리사와의 '폰트 파크'다.


이렇게 의미있는 작업을 한 '모리사와'라는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 찾아보았다.




모리사와는 1924년 '국문 사진 식자기'를 개발하여 세계최초 특허 등록한 '모리사와 노부오'가

1948년 '모리사와 사진 식자기 제작 주식회사'를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 모리사와 노부오가 만든 국문 사진 식자기 모형

출처 : http://www.morisawa.co.jp/corp/history/index.html >



이 회사의 역사를 보다 특이한 것이 있었다.


계속 인쇄 관련 기술만 제작하던 모리사와 사진 식자기 제작소(1958년 이름이 한 번 바뀌었다)는

1964년 동경 올림픽을 맞이하여 NHK의 요청으로 '동경 올림픽용 타이틀을 식자하는 테레비텔로프전용기' 를 만들게 된다.

이미 인쇄와 식자 쪽에서는 온갖 특허를 다 받았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인쇄산업에 큰 영향을 주었던 이 회사는

이로써 훗날의 TV용 자막의 '디지털 타이포 그라피'의 초석을 다지게 되는 의미있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TV용 식자기 MD-T형, 이로써 모리사와 식자기 제작소는 과학기술청장관상을 수상한다

출처 : http://www.morisawa.co.jp/corp/history/index.html >



그리고 이 회사는 1980년, 라이노타이프폴이란 합작으로 모리사와라이노타이프 주식회사라는 타이포그라피 전문 회사를 설립한다.

참고하기 위하여 모리사와 폰트와 관련된 몇 가지 이미지들을 퍼왔다.



아래는 일본 타이포 그라피의 아빠 다나카 잇코가 디자인한 모리사와 폰트 (다나카 잇코 상세 약력)



<출처 : http://blog.naver.com/pirarucu/150002623273>





아래는 모리사와 폰트를 이용한 타이포 그라피 작품들

 

<출처 : http://blog.naver.com/it4444/130019815912 >





이것들을 보고 전직 편집자이자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개돌사마가

'한글은 이런 거 하기엔 너무 복잡해'

라고 말했다.


문득, 떠올랐던 것이 옛날 안상수 선생님께서  '한글은 정방형을 벗어나야 한다' 고 주장했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한글은 하나의 정방형이 하나의 소리를 내기 때문에 위대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안선생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이너인 양반이 하신 말씀인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했었는데

오늘 개돌사마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때 안선생님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안선생님께서 정방형을 탈피하여 만든 것이 아래와 같은 폰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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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torrent - etc - 2011. 3. 9.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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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잘 부르는 가수의 정의 - etc - 2011. 3. 6. 01:57
“어느 인터뷰에서도 말한 적이 있는데요. 김장훈 선배를 예를 들면 가창력이 수려하기보단 거친데 들었을 때 뭔가 느껴지거든요. 그 사람의 삶이 느껴질 정도로요. 감성을 전달하는 힘이 있는 가수가 좋은 가수인 것 같아요. 정확히 멜로디를 지킨다거나 음역대의 폭이 넓은 것은 크게 중요치 않다 생각해요. 한 구절을 불러도 사람들이 들었을 때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느낀다면 좋은 가수겠죠.”

정엽

나도 심히 공감함
가끔 지식인에 물어보는 이 가수 정말 잘 부르나요??

이런 질문들 볼때마다 눈물이 난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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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교회라면 나도 다니고 싶다! - etc - 2011. 2. 19. 01:42
기독교,불교,천주교 모두 다녔던 나로서는

정말 이런 교회라면 다니고 싶다~ㅋ(지금은 기독교를 제일 싫어하게 됐지만..)

자전거 여행하면서 들렸었던 그 작은 교회가 생각나네~ㅋ

http://news.nate.com/view/20110218n01455

신자 70명 넘었다고 셋으로 나눈 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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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십자가 - 예배당 - 직분 없는 서울 방배동 ‘동네작은교회’

‘동네 작은 교회’가 있다.

“동네 작은 교회 다녀요”라고 말할 때의 그 작은 교회가 아니다. 실제 교회 이름이다. 하지만 서울 서초구 방배동 어딘가에 있다는 이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17일 교회를 찾아 나섰지만 골목길에서 몇 차례 길을 잃은 뒤 두 개의 작은 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3무(無) 교회’

아래에는 ‘사과나무’, 위쪽에는 ‘방배 아지트’라고 적혀 있고 구석에 동네작은교회라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이곳은 십자가나 예배당은 물론이고 권사와 장로 등 교회의 직분도 없는 이른바 3무 교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피향이 진하게 풍겼다.

“생뚱맞게 들리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부르짖을 자유도 있죠. 그런 자유까지 주신 것 아닌가요.” “그걸 어떻게 선택하는가를 보는 분이 하나님 아닐까요?”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은 20, 30대 10명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의 동아리 방 분위기다. 13평 남짓한 이곳은 낮에는 사과나무라는 카페로, 영업이 끝난 뒤에는 신자들의 소모임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교회는 이곳을 포함해 내방역 근처의 카페 ‘나무’, 사당동의 동네작은도서실 등 세 곳을 아지트라는 이름으로 두고 있다. 예배는 어디서 볼까. 일요일마다 인근에 있는 회사의 도움을 받아 지하 강당을 빌린다.

○ 세 가지 원칙

2007년 20여 명이 시작한 이 교회는 현재 70여명의 신자가 있다. 이 교회는 지난 일요예배에서 창립 이후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 교회를 다시 더 작은 세 개로 나눈 것. 신자 수가 20명이 넘으면 분리한다는 원칙을 따랐다. 김종일 담임목사(46)는 “여러 목회자가 많은 열매가 열리는 ‘큰 사과나무’를 생각하지만 우리는 작은 사과나무 여럿을 심는 것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가 커질수록 돈과 권위, 권력 등 세속적인 유혹에 약해진다는 것이 그를 비롯한 ‘동네교회 사람들’의 생각이다. 김 목사가 공개한 지난해 예산은 1억4000여만 원. 목사 사례비(월 180만 원)와 공간 임차료(한 곳당 월평균 50만 원) 등을 포함해 1억2000만 원이 지출됐다.

김 목사는 “대형 교회처럼 건물 유지와 조직 관리에 큰돈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다”며 “예산의 40%가 봉사와 장학사업 등에 사용된 것을 알고 주변에서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일요 예배 후 나누는 식사 메뉴는 창립 이후 줄곧 1000원짜리 김밥이다. 일요일이 신자들에게 안식일이자 서로 축복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데도 식사 준비와 다양한 행사로 피곤한 날이 되고 있다는 반성에서다.

마지막 원칙은 ‘평신자 중심의 교회’다. 김경삼 씨(33)는 “설교만 듣는 게 아니라 참여하면서 서로 속내를 나눌 기회가 많다”고 말했다. 작고 건강한 초기 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는 진한 커피향의 교회다. 끝없이 추락하는 개신교 대형 교회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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