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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9101356571&code=940100

50대 남성이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친구를 구한 후 자신은 숨져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10년 전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홀로 고향에 돌아와 친구 농사를 도우며 사는 김모씨(57·광주 남구 이장동).

김씨는 5년 전부터 당뇨를 앓아 최근 건강이 악화됐지만 죽마고우 이모씨(57)가 있어 늘 힘이 됐다.

8일 오후 6시쯤 여느 때처럼 김씨는 이씨의 비닐하우스 근처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김씨는 “농로에서 지게차를 이용해 짐을 옮기는 중인데, 지게차 한쪽 바퀴가 논으로 빠져 떨어질 것 같으니 도와달라”는 이씨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 김씨는 부랴부랴 옆에 있던 콤바인을 끌고, 20m 가량 떨어져 있던 이씨에게 달려갔다. 친구는 지게차에 타고 경사진 농로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김씨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타고 온 콤바인과 지게차를 밧줄로 연결한 뒤 지게차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씨가 타고 있던 지게차가 갑자기 무게중심을 잃고 논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이씨의 머리와 목이 지게차에 눌려버린 상황이 벌어졌다.

당황한 김씨는 황급히 농장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트랙터를 몰고 사고 현장에 되돌아왔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이씨의 모습을 본 김씨는 친구를 살려내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였다.

트랙터로 친구의 머리를 누르고 있던 지게차를 간신히 들어올린 김씨.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된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김씨는 119에 실려 병원으로 옮겼으나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사고후 2시간 후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이씨는 “정신을 차리고보니 김씨가 나를 마지막까지 꼭 껴안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 않았다. 차가워진 친구의 몸을 흔들며 계속 이름을 불렀지만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숨진 김씨를 검안한 의사는 “지병을 앓던 김씨가 위험에 처한 친구를 살려낸 뒤 몸의 힘이 모두 빠지면서 갑자기 숨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SBS 스페셜 - etc - 2010. 9. 6. 10:23

http://www.artsnews.co.kr/news/100821


우리 주변국들은 참.....

▣  숀리의 다이어트 킹 - etc - 2010. 9. 2. 10:12
출처 : http://blog.daum.net/bu-up/7103015

 트레이너 숀리는 “이불이 100일 동안 다이어트 하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은 필수품목이다”라며

“아침에 눈 떴을 때 30분이 다이어트를 좌우한다”고 얘기하였는데요.

트레이너 숀리의 부팅이란 표현이 생소하긴 했지만 나름 참고해가며 열심히 따라해 봤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시는건 어떠신지~~

 

 

 

'이부자리 운동법' 첫번째 목과 척추 부팅입니다^^

(자세가 재밌있습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뱃살운동은 저에게 압박입니다 ㅠㅠ)


 

 

'이부자리 운동법' 두번째, 세번째 팔과 상체 부팅입니다^^

(팔다리를 쭉펴고 옆으로 왔다갔따 일어났다 자세가 쉽지만은 않은거 같네요^^

앞으로 숙였다 일어났다 나비동작은 보기엔 정말 재밌네요^^)

 

 

'이부자리 운동법' 두번째, 세번째 팔과 상체 부팅입니다^^

(마지막 하체를 풀어주는 운동인데 푸쉬업에 다리를 점프,점프 하는게

따라해 보시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이부자리 운동법' 전체 동영상입니다.^^

 

자료출처 - SBS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

 

 

최소 3개월 정도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분들, 귀차니즘으로 택시를 즐겨타시는 분들,

운동은 보는거라고 자기주관을 뚜렷하게 강조하시는 분들,

 

아침부터 운동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시지 마시고

한번 시작해 보시는건 어떨까요?

다같이 저랑 같이 운동 시작하시죠~~

다가오고 있는 뜨거운 여름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트리플X 식단 지침>

 

첫째 - 세끼의 끼니는 규칙적으로 정시에 정량을 반드시 섭취한다.(하루4~5시간 간격)

둘쨰 - 고단백저칼로리 요리를 섭취하되, 탄수화물,단백질,지방,무지질,비타민 등

골고루 균형잡힌 식사를 한다.

셋째 - 염분과 당 사용은 최대한 제한한다.

넷째 - 하루 섭취칼로리는 1200Kcal~1800kcal(개인차 있음)정도에 맞춘다.

다섯째 - 삶기, 찌기, 굶기 등의 가장 기본적인 조리방법으로만 조리한다.

 

 

<트리플X 다이어트 도시락 기본 식재료>

 

1.단백질 - 닭가슴살, 두부, 계란흰자, 소고기등

2. 탄수화물 - 고구마, 감자, 단호박, 현미 ,통밀빵등

3. 지방 - 땅콩, 아몬드, 호두 등의 견과류

4. 그 외 - 버섯, 당근, 오이, 브로콜리, 토마토 등 각종야채, 제철과일

 

<주의사항>

 

- 샐러드에 드레싱은 포함되지 않는다.

-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점심은 먹고싶은 음식으로, 아침과 저녁은 저칼로리로 섭취하여

다이어트에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인다.(6일간 식단섭취를 잘했을 경우)

5. 기타 다이어트 식품 및 보조식품 섭취는 금한다.

 

트레이너 숀리가 트리플X에 대해 이렇게 말했죠 ~


첫째 돈이 들어가지 않는것
두번쨰 절대로 굶으면서 빼지 않는 것
세번째 절대로 요요현상이 없는 것

 

근데 돈은 좀 들거 같습니다;;

자신을 믿고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면 1달에 10Kg 이상 감량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숀리를 보며

따라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 와이프에게 저렇게 식단짜달라고 말했다가 맞을뻔 했지요;;

(제 와이프가 다부진 스타일이라..)

 

 

 

트리플X 식단의  레시피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

 

고단백닭가슴살샌드위치 , 닭가슴살버섯야채볽음, 닭가슴살스테이크 세가지입니다 ^^

 


* 고단백닭가슴살샌드위치

 


재료 (1인분)

닭가슴살 100g, 고구마 50g, 적채 20g, 당근 20g, 양파 20g, 후추, 식빵 2쪽, 플레인요거트 1TBS

 

 

< 요리법 >


1. 닭가슴살은 통마늘, 후추, 생강가루, 월계수잎을 넣고 약 20분 정도 삶아 익혀주세요.

2. 고구마는 껍질을 벗긴 후 찜통에 약 25분 정도 쪄 주시고

3. 야채는 종류별로 커터기에 갈아 준비해 주세요.

4. 삶아진 닭가슴살도 커터기에 간 후, 고구마, 야채와 함께 볼에 담아 후추를 넣고 으깨어 샌드위치 소를 준비합니다.

5. 혼합된 샌드위치 소는 단단하게 뭉쳐 식빵크기로 속을 만들고

6. 식빵은 테두리를 깔끔하게 자른 후 플레인요거트를 바르고

7. 식빵 사이에 소를 넣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면 고단백의 영양만점 닭가슴살 샌드위치가 완성됩니다.

 

 

* 닭가슴살버섯야채볶음

 


재료(1인분)

닭가슴살100g, 양파 40g, 당근 10g, 호박 20g, 새송이버섯 30g, 느타리버섯15g, 팽이버섯 10g, 후추, 다진 마늘, 생강가루

 

< 요리법 >

 

1. 닭가슴살은 한입 크기로 잘라 준비해 주세요.

2. 양파는 0.6cm 정도의 크기로 슬라이스하고

3. 호박은 반달썰기로 준비합니다.

4. 새송이버섯, 느타리버섯, 팽이버섯은 깨끗이 준비해 두고

5. 팬에 닭가슴살에 다진마늘, 생강가루, 후추를 넣고 약간의 물로 살짝 볶아 냅니다.

6. 이에 단단한 당근먼저 넣어 볶고, 그 다음 호박, 양파, 버섯 순으로 볶습니다.

7. 닭가슴살과 당근 등의 야채가 다 익으면 후추를 살짝 넣어 마무리하면 담백한 닭가슴살 버섯 야채 볶음이 완성됩니다.

 

 

* 닭가슴살스테이크

 


재료 (1인분)

닭가슴살 100g, 적채 20g, 피망 또는 파프리카 20g, 양파 50g, 청피망 20g, 홍피망 20g, 브로컬리, 새송이버섯

 

< 요리법 >

 

1. 닭가슴살과 적채, 피망은 잘게 다져 준비해주세요.

2. 다진 재료들을 후추 약간과 함께 섞고 스테이크 패티를 만들어주세요.

3. 스테이크 패티는 전기오븐에(160-170∘c) 앞, 뒤로 각각 20분씩 굽고

4. 양파, 청피망, 홍피망은 각각 채 썰어 준비합니다.

5. 채 썬 야채를 기름을 두르지 않은 팬에 물을 조금 넣고 팬에 후추 약간과 함께 볶아주세요.

6. 스테이크 패티 위에 볶은 야채와 구운 새송이버섯을 올리고 데친 브로컬리, 방울토마토, 단호박 등과 함께 담아내면

저칼로리의 근사한 한 끼 다이어트 도시락이 완성됩니다.

 


늘어진 뱃살에 한숨쉬시며 오늘도 야식을 꾸준히 드시는 분들

다이어트 해야지 하시면서 오늘까지만 먹어야지 하시는 분들 

 

한번 시작해 보시는건 어떨까요?

다같이 저랑 같이 운동 시작하시죠~~

다가오고 있는 뜨거운 여름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자료출처 - SBS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 게시판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8/14/3956117.html?cloc=nnc

젊은 직원들에게 ‘김탁구’ 보라 하죠, 빵 만드는 정신 배우라고요” 모두들 퇴근한 팔봉 제빵실. 누군가가 홀로 오븐 속에 반죽을 넣고 빵을 꺼내길 반복한다. 새까맣게 타고 한쪽이 찌그러진 불량 빵만 나와도 포기란 없다. 땀에 젖은 모자 안쪽엔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 ‘제빵왕 김탁구’. 1974년, 대학생 임영진은 아버지의 빵집 ‘성심당’의 오븐 앞에 처음 섰다. 다섯 명뿐인 직원이 “가불해 주지 않는다”며 집단으로 파업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보기만 했던 빵 굽는 일. 정작 손에 밀가루를 묻혀 굽자니 무척 불안했다. 200도에 구워야 하는 롤 케이크. 빤히 알면서도 행여나 탈까 걱정스러워 150도에 구웠다. 종이처럼 뻣뻣해진 롤 케이크는 말리지 않았다. 학교에 나가지 않고 빵에 몰입했다. 훌쩍 36년이 지난 2010년 현재, 임영진씨는 성심당 대표로 여전히 오븐 앞을 지키고 있다. 

대전=유지상·이상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성심당은 대전의 랜드마크 빵집이다. 상호를 잊었다면 “따끈한 빵을 무제한 시식할 수 있는 곳” 아니면 “그날 팔다 남은 빵은 모두 기부하는 곳”을 물으면 누구나 대전역 앞 으능정이 거리의 성심당으로 안내해 준다. 성심당은 점포 한 곳의 매출이 연 60억원. 하루 평균 1500만원 이상의 매상을 올리는 곳이다. 요즘 잘나가는 대기업의 유명 프랜차이즈 베이커리 브랜드도 근처에 얼씬 못하게 제압했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속 탁구는 빵 스승인 팔봉 선생에게 이렇게 묻는다. “할배, 우리 어메가 세상은 결국엔 착한 사람이 이기는 거라던데 이게 참말입니꺼?”그 대답을 현실 속 ‘제빵왕 임영진’ 대표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다.

● ‘성심당’의 시작은 어땠나요.

1956년 대전역 앞에서 문을 연 ‘찐빵집’ 성심당.
“아버지(고 임길순씨)가 1956년 작은 찐빵집으로 시작했어요. 5년이 지나고서야 제과점 형태를 갖췄고요. 처음 차렸을 때부터 그날그날 남은 찐빵은 배고픈 이웃들에게 나눠줬어요. 화제였죠. 지금과 달리 그 시절 음식은 생명을 상징했으니까요.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며 감사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함북 함주가 고향인데 1950년 흥남 철수 때 마지막 배(메러디스 빅토리호로 피란민 1만4000명을 태워 철수)에 가까스로 올랐어요. 그리고 6년 뒤 대전역 앞에 작은 찐빵집 ‘성심당’을 차렸죠.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직원들의 집단파업으로 일손이 모자라 빵집 일에 뛰어들었어요. 처음엔 어려웠지만 빵의 미묘한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반죽법과 발효상태에 따라 천의 얼굴을 했으니까요.”

● 36년간 만든 제품 중 최고 히트상품은 뭔가요.

“성심당을 키운 일등 공신 세 가지가 있습니다. 1980년 출시한 튀김소보로가 그중 하나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들의 장점을 합쳐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단팥빵 속 달콤한 팥, 소보로빵의 바삭한 껍질, 찹쌀 도넛의 쫄깃한 반죽을 합쳐 ‘튀김소보로’를 만들었죠. 신기한 빵이 나왔다”며 손님들이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섰어요. 원래는 빵이 식으면 마지막에 초콜릿시럽을 끼얹어 코팅하려고 했는데, 식기 전에 다들 집어가는 바람에 초콜릿시럽은 한 번도 못 써봤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대로 팔고 있죠.

● 나머지 대표 상품도 궁금하네요.

82년 일본 신혼여행 때 후쿠오카의 ‘몽블랑’ 빵집에서 새로운 케이크를 봤어요. 당시 우리나라엔 딱딱하고 느끼한 버터크림 케이크뿐이었는데 그곳에서 본 생크림 케이크는 부드러우면서 달지도 않아 충격이었죠. 당장 생크림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워 와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15일을 진열해도 끄떡없던 버터크림 케이크와는 달리 생크림은 하루만 넘겨도 상했죠. 고민 끝에 케이크 시트만 미리 만들어 놓고 주문 즉시 손님 앞에서 생크림을 올렸어요. 손님들이 몰려 서서 구경했죠. 생크림 짜는 데 3분이 걸려 ‘3분 케이크’라는 이름을 붙였고, 신기한 케이크라고 입소문이 났어요. 마지막은 포장빙수입니다. 85년에 개발했는데 당시엔 테이크 아웃의 개념이 없었어요. 여름이면 어르신들은 양은냄비를 가져와 빙수를 담아 갔어요. ‘더 편하게 먹게 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 병원에서 링거 감쌀 때 쓰는 스티로폼이 떠올랐죠. 스티로폼 통을 만들어 빙수 봉지를 넣고 뙤약볕을 걸어다녔어요. 철봉에도 매달아 놓고. 3시간이 지나도 안 녹고 그대로더라고요. ‘3시간 빙수’라고 이름 붙였죠. 당시 대전 사람들은 서울 갈 때 포장빙수를 일부러 들고 갔어요. “서울에도 없는 게 대전에 있다”며 자랑했죠.”

● 어려움도 많았겠습니다.

“그럼요. 빵을 기부하는 것조차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은 빵 가지고 생색낸다’부터 ‘썩은 빵 아니냐’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87년 6·10항쟁 때예요. 성심당 바로 맞은편이 주교좌 성당인데 당시 주교좌 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같은 역할을 했어요. 시위 때면 빵집 주변까지 온통 마비돼 빵을 못 팔았어요. 그날도 빵이 몽땅 남은 날이었어요. 학생과 전경은 서로 악에 받쳐 있었죠. 저희는 양쪽 모두에게 빵을 나눠줬어요. 굶주린 학생들도 안쓰러웠고, 전경들도 따지고 보면 학생들과 같은 나이인데 마음이 아팠거든요. 그런데 결국 학생들에게 빵을 나눠준 것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갔어요. ‘부정식품 판다’는 누명을 쓰고서요. 경찰서에선 부정식품이란 증거가 없자 보건 연구기관에 의뢰했어요. 검찰에까지 올라갔는데 혐의가 없으니 결국 검찰에서 ‘무고하다’는 결과가 나왔죠.”

● 모든 비즈니스엔 라이벌이 있게 마련인데요.

“요즘 동네 빵집, 일명 ‘윈도 베이커리’가 문을 닫고 있습니다. 대자본의 프랜차이즈 제과점 때문이죠. 성심당 옆에도 92년 서울 강남의 ‘뉴욕제과’ 체인이 들어왔다 2년 만에 철수했어요. 그 후로 다른 프랜차이즈는 들어올 시도를 안 해요. 사실 규모와 자본으로 치면 저희가 대형 프랜차이즈 기업을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가장 성심당다운 강점이 뭔지. 답은 ‘갓 나온 신선하고 따끈한 빵’과 ‘동네 빵집만의 푸근함’이었어요. 냉동 생지를 공급받는 게 아니라 저희가 직접 반죽한 생지를 써서 그 자리에서 구워내잖아요.

● 무제한 빵 시식은 어떻게 나온 아이디어 인가요.

일단 빵이 나오면 종을 크게 치면서 알려요. 그리고 갓 구운 뜨끈한 빵을 손님들에게 마음껏 먹도록 해요. 간혹 직원들이 “아깝다”며 시식에 제한을 두자고도 해요. 시식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한 뒤 그냥 가는 손님도 많거든요. 하지만 야박하게 구는 순간 동네 빵집이 가진 매력은 사라져요. 저희 집 빵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큼지막해요. ‘유행에 맞게 작고 예쁘게 만들까’ 흔들린 적도 있지만 성심당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날 팔고 남은 빵은 모두 기부하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기부하는 빵을 액수로 치면 한 달에 1000만원 정도 돼요. 매주 일요일 대전역 노숙자들에게 빵 250개를 선물할 땐 모자라서 새로 만들어 가고요. “다음 날 반값에 팔면 500만원이라도 남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500만원보다는 사랑을 나누는 가치가 더 크다고 믿어요. 그게 저희만의 여유고요. 감사하게도 둘 다 성심당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됐어요. 무제한 시식 때문에 빵집이 항상 붐비니 궁금한 마음에 더 찾고, 남은 빵을 기증하는 게 알려지며 ‘성심당은 남은 빵 안 판다’는 소문이 났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주연을 맡은 유시윤.
●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인기가 영향을 미치나요.

“단팥빵·소보로빵·크림빵의 매출이 2배씩 늘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한 빵들이죠. 질문도 많이 받아요. 구일중(김탁구의 친아버지이자 제빵의 달인)이 빵 만들기 전 두 팔을 벌린 채 손가락을 움직이잖아요. ‘실제로도 그렇게 하느냐’고 손님들이 묻는데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온도와 습도를 재는 모습을 극대화해 표현했다고 봐요. 그 시절(1970∼80년대)엔 시설이 지금 같지 않아 온도 하나, 습도 하나에도 세심히 신경썼어요. 같은 반죽이라도 온도와 습도에 따라 전혀 다른 빵이 되거든요. 젊은 직원들에겐 꼭 챙겨 보라고 해요. 레시피로만 빵을 배운 요즘 사람들이 제빵인의 기본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기회죠.”

● 궁극적인 목표는 뭔가요

“중국에서 1년이면 400여 명의 제빵인이 찾아옵니다. 오면 기술부터 배우려고 하죠. 정말 알려주고 싶은 건 따로 있어요. ‘남을 밟지 않으면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성심당 사훈이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십시오’예요. 주인만 좋아서도, 손님만 좋아서도 안 돼요. 직원들까지도 좋아야 합니다. 성심당엔‘한가족신문’이란 게 있어요. 일주일 동안 자기에게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공동 블로그에 올리고, 월요일 회의시간엔 그 블로그를 바탕으로 신문을 만들어요. 직원 한 명 한 명을 알 수 있는 방법이죠. 지난달 한 직원이 사망했을 때 다른 직원들이 그 친구를 위한 추모신문을 만들었어요. 함께 찍은 사진을 모으고 편지를 썼는데 30장이 넘었죠. 가슴이 찡했어요. 저는 빵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요. 임영진은 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고 성심당 역시 지구 밖에선 점 하나도 안 되는 곳이죠. 하지만 빵으로 사랑을 나눔으로써 성심당이 대전을 변화시키고, 저를 찾은 제빵인들은 자기 도시에 또 다른 성심당을 만들어 간다면, 언젠가는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조인스 핫 클릭]



소년 CEO의 창업 성공 요인은 "열정", "멘토" 그리고 "

 

마이크로 소프트 잡지에서 "소년 CEO의 창업 스토리"라고 해서 호기심에 한번 읽어보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애플이나 구글같은 거인들의 창업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작은 회사의 창업기도 아기자기 하고 재미있네요. 어쩌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읽다 보면 이 소년이 13세에 창업을 했다는 사실을 잊게되고, 그저 한명의 훌륭한 비지니스맨으로 느껴집니다. 역시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것은 '나이'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인상적인 구절 하나.

"인생의 목표는 몸을 온전하게 보존하여 무덤 앞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옆으로 미끄러지고,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 '제길, 정말 끝내주네!!!" 라고 소리쳐 보는게 더 좋다."

 

인상적인 구절 하나 더,

"네가 농구시합이 끝날때까지 반칙을 하나도 범하지 않았다면, 너무 느슨하게 경기했다는 뜻이야. 넌 수비하면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거야"

 

두시간 정도면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니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나쁜 보스와 좋게 지내는 방법 - etc - 2010. 7. 23. 20:35

http://www.bloter.net/wp-content/bloter_html/2010/07/35450.html

[늘푸른길의 책]맘에 안드는 ‘나쁜 보스’와 좋게 지내는 방법
by 늘푸른길 | 2010. 07. 23

어느 날 오후, 인사담당자를 포함하여 여섯명의 부서장들이 사장님 방으로 모였다. 긴급 회의 내용은 ‘경영난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해야 하며, 최소한 10명을 추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자를 뽑아서 올리라는 내용이다. 누굴 올리나? 망설이는 틈에 인사팀에서는 결국 10명의 명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메일로 당사자에게 통보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메일을 받고는 “왜 내가 대상자인지 모르겠다”며 물었다. 다음날 그는 어떤 명쾌한 답도 얻지 못하고 짐을 정리하고 회사를 떠났다.

왜 그가 대상자가 되었을까?

이게 기업 조직이다. 같이 밥을 먹고 회의를 하더라도 끊임없이 뭔가에 의하여 ‘사내순위’가 결정된다. 기업은 실적을 좋아한다. 좋은 일로 순위가 결정되어 상을 받기도 하고, 좋지 않은 고과를 받아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고 심한 경우는 ‘해고통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에는 사람이 모두 관여를 한다. 특히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속 상사인 ‘보스’는 이러한 일들에 대한 권한을 갖고, 업무를 추진한다는 명목하에 직원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이런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 눈치 빠른 직원들은 이미 어느 줄에 가 서야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를 파악한다. 자신을 돌봐줄 사람을 스스로 찾아나서기도 한다. 묵묵히 일만 한다고 다였던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국내 유통회사에서 일하는 한 중간관리자는 줄 잘 못섰다가 ‘자신의 꿈’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름거린다. 자신을 키워준 임원이 인사이동으로 승진에서 빠지고 다른 곳으로 발령나자, 힘을 더 이상 쥘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도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 자신의 일을 더 확장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에 대해서 끊임없는 ‘정치’를 한다. 서로 군림하고 군림당하지 않으려 무단히 애를 쓴다. 일보다는 이러한 ‘사내분위기’로 인하여 더 어려워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술자리 직장인들간의 이야기거리는 대부분이 ‘보스’에 대한 이야기다.

외국계 은행에서 임원으로 일하시는 한 분은 늘 자신의 상사를 ‘보스’라고 표현하고, 모임에서 그에 대한 업무스타일을 이야기 한다. 나름 그가 보스를 다루는 방법, 좋아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대한다. 그는 그의 보스에 대해서 회사내에서나 연관된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보스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쉽게 처리할 일도 부서장의 업무스타일에 따라서 뱅뱅 돌다가 볼 일 다 본다. 좋은 사람,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은 ‘복’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복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 이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책 ‘나쁜 보스’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인 직장인들을 위한 탈출비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음직한 일들에서부터 설마 이런 일들까지 있을까 하는 일들이 소개된다. 이론보다는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수집한 사례들이 담겨있어, 상황을 파악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운나쁘게 내 앞에 나쁜 보스가 와 있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자. 그를 이용해서, 나를 키우는 방법은 없는지,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고생하지 말고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 피해가는 방법도 있다. 보스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이다. 마음고생하면서 밑에 있을 이유가 없다. 제 살길은 스스로가 찾아가야 할 것이다.

“정치가 없는 곳은 없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나쁘다고 욕만 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정치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궁리해야 한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는 결국 이렇게 나쁜 보스 밑에서 서류결재로 힘들어하고, 일같지 않은 일로 괴롭힘을 당한 사람도 언젠가는 바로 그 자리에 올라 설 수 있으며, 이왕 보스가 된다면 제대로 된 ‘나쁜 보스’로 사람을 이끌어 가는 강한 보스가 되기를 권한다. 양보해야 할 것과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실적 앞에서는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사람은 어느 길에서 만날지 모른다. 그러기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말에 있어서는 신중해야 한다. 사내에서의 말은 정말 ‘절약’하고 ‘절약’해야 한다. 너만 알라고 해 준 말은 이미 다 알게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직속상사에 대한 말은 아껴야 한다. 자신의 갖고 있는 패를 다 열어줘서는 안된다.

이렇게 나쁜 보스를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될 때, 그에 따른 상황별 대처와 탈출법을 알고 있다면 빡빡한 직장생활에 활력을 던져 줄 것이다. 무엇보다, ‘눈치가 센스’라는 말을 무시하지 말 일이다. 상황판단을 빠르게 해야 한다. 나설 자리, 낄 자리 파악이 빨라야 한다는 말이다.

“부하는 때와 장소와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공식회의 석상에서 보스의 의견에 대놓고 반대하는 언행을 하는 것은 적절한 타이밍을 못 잡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권한 밖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오버’와 ‘월권’은 보스의 눈 밖에 나기 딱 좋은 행동들이다. 시간이 급하다고 해서 마구 나설 일이 아니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들을 통해 보스와 부하의 관계를 파악하다보면 나의 위치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일 것이다.

알고 있는 분 중에 한 분은 한 가구에서서 10여년을 근무하고 있는데, 이 가구회사의 사장님이 자신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충성’을 요구하며 거래업체를 통해 혹 불법적으로 해준 것은 없는지 뒷조사까지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뒤를 캐도 달리 책 잡을 일이 없으니, 뭐라고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이 회사를 다니고 있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주말도 없이 일을 시키고 호출하는데도 그만두지 못하고 다니고 있다.

왜 그는 이 일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보스의 능력인가, 이 사람의 무능력인가? 아니면 둘 사이의 궁합이 그럼에도 잘 맞아서 그런걸까?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휴가기간 중 이 책을 읽으며 직장생활도 되돌아보고 ‘보스의 자리’를 한 번 생각해보는 일은 직장생활의 ‘줄타기’를 재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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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 특강 - 아이폰의 교훈 3가지 - etc - 2010. 7. 1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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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잡스 - etc - 2010. 7. 18. 02:00

[Weekly BIZ] 날개 없는 선풍기에서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맘스버리(영국)=박수찬 기자 sooch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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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잡스' 다이슨을 만나다
비틀스만큼 유명한 가전회사 '다이슨'

청소기에 먼지봉투가 왜 필요해?…
이 남자 앞에선 100년 된 고정관념도 뒤집힌다

회사는 맘스버리(Malmesbury)란 소도시에 있었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차로 1시간 30분 떨어진, 인구 5000여명의 중세풍 도시다. 이곳에는 7세기 처음 세워진 맘스버리 성당과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올드 벨’(1220년 건축) 말고도 명물이 하나 더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비틀스만큼 유명한 가전회사 다이슨(Dyson)이다.

2001년 엘리자베스 여왕도 다녀갔다는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리셉션 데스크에 앉은 여직원을 제외하고 모든 직원은 청바지나 면바지 차림이다. 벽에는 미술 작품 대신 가로 2m, 세로 1.5m 크기의 대형 설계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그 유명한‘날개 없는 선풍기(제품명 에어멀티플라이어)’의 설계도였다. 2009년 타임(Time)이‘올해의 발명품’가운데 하나로 꼽은 선풍기이다. 가운데가 뻥 뚫린 동그라미 안에서 마치 마술처럼 바람이 나오는 모습은 직접 봐도 쉽게 믿기지 않는다.

사무실 출입문에는 보라색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그 중 하나에 이렇게 쓰여 있다. “ 전기를 이용한 최초의 선풍기는 1882년 발명됐다. 날개를 이용한 그 방식은 127년간 변하지 않았다.”

이 회사의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63·Dyson)은 선풍기에 날개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그는 엔지니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선풍기는 꼭 날개를 써야 하지? 돌아가는 날개 때문에 바람이 중간중간 끊기고 날개를 청소하기도 어렵잖아. 더구나 아이들은 늘 손가락을 넣고 싶어해 위험하잖아.”



제임스 다이슨과‘날개 없는 선풍기(에어멀티플라이어)’. 이 제품은 2009년 미국의 시사 잡지‘타임’이 선정한‘올해 가장 혁신적인 제품 톱10’에 뽑혔다. /AP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선풍기의 틀이 깨지는 데는 4년이 걸렸다. 높이 50㎝ 크기의 프로토타입(시제품)을 시작으로 개발을 거듭한 결과였다. 작년 10월 영국에서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 제품은 겨울에도 구하기 어려운 초인기 상품이다. 한국에는 이르면 올겨울에나 들어올 예정이다.

영국 산업계의 이단아,‘ 영국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는 제임스 다이슨은 요즘 전 세계 기업가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의 이름을 단 청소기는 비싼 가격(국내 판매가 65만~100만원)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북미시장에서 1등을 달리고 있다. 그가 히트시킨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 덕분이다.

최초의 현대적 진공청소기는 1901년 영국 발명가 부스(Booth)가 개발했다. 그 뒤 일렉트로룩스나 후버 같은 대형 가전회사들이 100년 가까이 전 세계 가정에 수억 대의 진공청소기를 팔았다.

다이슨사가 제작한 첫 진공청소기 모델인 DC-01. /다이슨 제공
하지만 그 100년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먼지봉투다.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돼온 진공청소기는 먼지봉투로 공기에서 먼지를 거른 뒤 봉투째 버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먼지가 봉투의 작은 구멍을 막기 때문에 금세 청소기의 흡입력이 떨어진다. 여기에 분노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다이슨이다.

그는 1979년 집에 딸린 낡은 창고에 들어가 5년간 5127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고, 마침내 세계 최초의 먼지봉투가 필요 없는 청소기를 개발했다. 원심분리기처럼 공기를 빠른 속도로 회전시켜 먼지를 분리해 내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특허를 팔고 원래 직업인 디자이너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시제품을 들고 2년간 미국과 유럽의 회사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당시 세계 1위 업체였던 후버를 비롯해 일렉트로룩스, 블랙앤데커 등 세계적 기업들은 기존 제품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왜 사람들이 먼지봉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죠? 사람들은 먼지봉투 방식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는 안 팝니다. 먼지봉투 판매는 우리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결국 남자는 자기 이름을 딴 회사를 세워 직접 제품을 만들었고 2002년 미국 시장 진출 이후 3년 만에 후버를 제쳤다. 비틀스 이후에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영국산(産) 제품이라는 명성도 얻었다.

직원들이“JD”라고 부르는 제임스 다이슨의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 다이슨은 개인 기업인 이 회사의 오너이지만, 지난 3월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지금은 수석엔지니어 직함만 가지고 있다. 일이 더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다.

"성공은 99%의 실패로 이뤄진다… 직원들이 실패하게 하라"

인터뷰는 12시 30분 시작됐다. 그의 오전 일정이 밀리면서 인터뷰는 1시간 늦춰진 상태였다. 다이슨은 점심도 건너뛴 채 질문에 답했다. 얼마 전 무릎 관절 수술을 해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새로운 기술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마치 소년처럼 눈이 반짝였다. 그는 처음 보는 것, 다른 것,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를 꺼내 들자 "어디 제품이냐" "기종은 뭐냐"며 꼼꼼히 물었다. 인터뷰 내내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공격적인 질문에는 지기 싫어하는 고집이 느껴졌다.

■우리는 경험이 없는 직원을 원한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다른(different)'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리는 예전과 다른 환경에서 남과는 다른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길 원합니다(We want to do something different, do it differently, in a different environment)."

다름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은 직원 채용에도 적용된다. 그는 "직원을 채용할 때 해당 분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제임스 다이슨과 그가 직접 개발을 지휘한 다이슨의 소형 진공청소기. ‘흡입력은 같으면서 크기는 작은 청소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5년간 48명의 엔지니어가 뛰어들어 모든 부품을 새로 만들었다. /다이슨 제공

―직원 교육 비용이 커지지 않나요?

"우리가 원하는 마케팅 직원은 경험이 부족한 마케팅 직원입니다.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마케팅 전문가가 아니에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선입견이 없고, 맡은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마치 탐험(pioneering)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요.

우리 회사 청소기의 경우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고객서비스센터 번호를 붙여놓습니다. 15년 전에 우리가 처음 이 일을 했을 때 경쟁사들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죠. '당신네 청소기는 쉽게 고장 나니까 그런 일을 하는 거지'라고요.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언제든 쉽게 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 아이디어는 제가 낸 게 아니고, 우리 고객 상담 직원 중 한 사람이 낸 것입니다. 그도 신참 직원이었죠."

그러고 보니 기자를 안내한 한국 판매 담당 매니저는 외교관 출신이었다. 직원들에 따르면 이 회사 연봉은 높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서울을 좋아하듯 갓 대학을 졸업한 영국 젊은이라면 런던을 선호하는 게 당연한데, 젊은 인력들이 이 시골까지 내려온다. 직원 마리오씨는 "다이슨에 없는 단어가 있는데 '불가능(impossible)'"이라며 "이런 분위기의 회사는 영국에서 여기뿐이고 다이슨에서 일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경력"이라고 말한다.




다이슨 본사 건물 문 손잡이에 붙어 있는 홍보 문구. 1882년 최초의 전기 선풍기가 나온 이후 127년간 전기 모터로 날개를 돌려 바람을 일으키는 방식에 변화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박수찬 기자
■직원들이 실패하게 하라. 빨리 배울지니

숱한 실패 끝에 성공을 이룬 그의 지론은 "성공은 99%의 실패로 이뤄진다"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실수하게 하면 일을 빨리 배운다"며 실패를 장려한다. 그래서일까? 다이슨이 내놓는 제품들은 개발 기간이 길다. 청소기가 5년, 날개 없는 선풍기는 4년이 걸렸다. 1999년 첫 시제품을 공개했던 로봇청소기의 경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개발 중이다. '완벽한 제품'을 위해 더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진공청소기 개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절망적인 상황의 연속이었죠. 빚은 계속 늘어가고 대기업들에는 문전박대를 당하셨는데 포기하고 싶단 생각은 안 들었나요?

"제 성격이 원래 포기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제가 올해 63세인데, 그 중 40여년간 실패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실패에 익숙해요. 엔지니어나 과학자의 삶에 실패는 늘 따라다닙니다. 성공이 오히려 드물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직원들이 개발 스케줄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실패만 하고 있으면?

"물론 프로젝트를 제때 끝내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제품을 내놓는 일입니다. 저는 직원들이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문책하지 않아요. 전혀요."

―하지만 그 모든 게 비용과 직결됩니다. 화가 나실 것 같은데요.

"아니요. 전혀 화가 안 납니다. 물론 일이 제시간에 끝나지 않는 경우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데 당사자들은 또 얼마나 짜증 나겠어요. 그래도 직원들이 새로운 실험을 하고, 그 과정에서 실수하는 건 언제나 환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새롭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거니까요."

그는 혁신이란 반복되는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는 힘든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술도, 시장 상황도 점점 더 빨리 변하고 있지 않나?

"기술의 발전이 욕조에 있다가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는 식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전해 가지요. 물론 지적하신 것도 맞습니다. 세상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저희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전에 분석·예측하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결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제품을 개선해 가는 '에디슨 방식'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시간을 아껴줄 뿐이죠. 컴퓨터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직접 시도해 보면서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야죠."

그의 말은 이 회사 연구센터를 살펴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적인 R&D센터라기보다 일종의 공방(工房) 같은 모습이었다.

이 회사의 개발 방식은 이렇다. 가령 어느 직원이 진공청소기를 개선할 아이디어를 낸다. 컴퓨터로 부품 설계도를 그려 'EOSINT 700'이라는 기계에 입력한다. 이 기계는 밤새 미세한 나일론 입자를 설계도에 맞게 눈처럼 뿌려 하루 안에 부품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다음날 출근한 연구원들은 새로 만든 부품 프로토타입을 기존 제품에 끼워보고 실제 성능이 좋아지는지를 테스트한다. 기자가 찾았을 때도 그런 테스트가 한창이었는데, 초당 6만장을 찍는 초고속 카메라로 새로 만든 청소기 기어가 잘 돌아가는지 살피고 있었다. 성능 개선에 실패하면 연구원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을 4~5일 주기로 반복한다.

직원 샘 버나드씨는 "다이슨의 특징은 직접 만들어가며 개선한다는 데 있다"며 "큰 혁신은 이런 작은 개선들이 모여 이뤄진다"고 말했다.

다이슨사는 영국에서 롤스로이스 다음으로 많은 특허를 가진 기업이다. 청소기와 관련해 소유·출원 중인 특허가 1100개다. 동시에 이 회사는 외부 용역을 주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디자인이든 기술 개발이든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오픈소스와 협업의 시대가 아닌가?

"물론 저희도 외부와 공동 개발을 합니다. 특히 대학들과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장기적인 프로젝트들이에요. 5년, 10년, 혹은 15년 이상이 걸릴 프로젝트들입니다."

■"돈에 맞추기 위해 기술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이슨은 내놓는 제품마다 "혁신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가격이 비싸다는 지적을 받는다. 청소기는 삼성·LG 등 국내 제품보다 2~3배 비싸다. 날개 없는 선풍기는 199.99파운드(약 36만원), 손 건조기는 600파운드(약110만원)나 한다. 높은 가격 때문인지 시장 공략 역시 유럽, 일본·미국 등 선진국 시장부터 서서히 확장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가격이 너무 비싸단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네. 비싸죠. 하지만 우리는 연구개발에 많은 돈을 씁니다. (소형 다이슨 청소기를 들어 보이며) 여기 들어가는 새로운 모터를 개발하는 데는 돈이 듭니다. 배터리 역시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돈에 맞추기 위해 기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도 목표 가격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품을 싸게 만드는 것보다 믿을 수 있고, 내구성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낮은 가격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그냥 싼 물건을 사면 되죠."

시장이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선진국에 집중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다이슨의 매출은 전년 대비 23% 늘었다.,

―자서전 <제임스 다이슨: 역경을 이기고·James Dyson: Against odds 국내 미출간>를 보면 "더 좋은 제품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원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2중 드럼을 채택한 세탁기는 호응을 얻지 못해 2005년 판매가 중단됐죠. 실패 원인이 뭐라고 보십니까?

"어제 어느 파티에서 다이슨 세탁기를 쓰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제는 다이슨이 세탁기를 만들지 않아서 아쉽네요. 다른 회사 제품을 사야 한다니 유감이에요.'

멋지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세탁기를 산 소비자들의 만족과 사랑이 성공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다만 문제는 제품 생산단가가 너무 높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영국에는 제대로 된 부품 업체도 없다는 점도 문제였어요. 그 때문에 판매 가격이 비쌌고(799파운드·약 146만원), 소비자 잡지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기능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채 말이죠."

■"전문가의 말을 듣지 마라"

다이슨은 '기술 지상주의자'다. 스트립 앤드 빌드(Strip and Build)라는 행사가 그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신입사원들이 출근 첫날 다이슨 청소기를 손수 분해·조립하는 행사다. 해외 판매업체 직원들 역시 맘스버리 본사를 방문하면 이 행사를 치른다. 기술에 대한 그의 욕심은 더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영국 내 기술 인력을 350명에서 700명으로 두 배 늘리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더 많은 프로젝트를 위해서"라고 했다.

―연구 인력을 늘릴 계획인데,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분야가 있나요?

"더 효율적인 모터, 로봇 기술 같은 분야가 예가 될 테고, 이 외에도 아주 많은 분야가 있다는 정도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앞으로 꼭 만들고 싶은 발명품이 있다면.

"우선 태양광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입니다. 우리는 태양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저를 좌절시키는 문제 가운데 하나예요. 저를 좌절케 하는 다른 문제는 소재입니다. 지난 50년간 탄소섬유나 티타늄을 제외하면 소재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가 공학 발전을 가로막고 있죠."

―젊은 엔지니어들에게 조언해 준다면.

"저는 조언을 아주 싫어합니다. 제가 남 이야기를 듣는 걸 싫어하거든요.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네요. '공학을 선택한 건 아주 현명한 결정입니다. 아주 멋진 미래가 있거든요'라고요. 제가 어렸을 때는 세계가 처한 문제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차를 예로 들면 빠르고 외양이 멋지게 만들면 그만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다 적은 에너지를 쓰고, 더 오래가는 제품을 원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엔지니어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것이고, 엔지니어가 되기에 이보다 좋은 시절이 없다고 봅니다."

―평소 "전문가(expert)들의 말을 듣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럼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누구의 말도 듣지 마세요. 다만 고객의 목소리를 들으세요. 그렇다고 고객을 찾아가 '어떤 제품을 원하세요?'라고 물으란 이야기는 아닙니다. 소비자들도 자신이 다음에 원하는 걸 스스로 알지 못하거든요. 그들의 습관을 읽고 그들이 깜짝 놀랄 만한 걸 내놓아야 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걸 발명하는 건 충분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당신이 만든 걸 좋아하도록 이끌어야(lead) 합니다."

―상장 계획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증시에 상장된 많은 영국 기업들은 정말 눈앞의 이해관계에 좌지우지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10~15년씩 긴 프로젝트를 합니다. 그래서 증시와 어울리지 않아요."

인터뷰가 끝나자 다이슨은 다리를 쩔뚝이며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그는 환히 웃으며 '만나서 기뻤고 토론 즐거웠습니다. 제임스'라고 사인한 자서전을 한 권 선물했다. 호텔에 돌아와 책을 뒤적이다가 출장 전에 읽었을 때는 흘려 넘겼던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다이슨은 이렇게 썼다.

"내 성공은 다이슨에 있는 모든 사람의 독창적인 정신과 비범한 노력 덕분입니다. 우리의 모험이 신나는 이유입니다. 모두 감사합니다(297~300쪽을 보세요)." 그 마지막 네 페이지에는 다이슨 직원들의 이름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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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불만족 / 걷기 부족이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낳는다~! - etc - 2010. 7. 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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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경하는 멋진 분 커넬 - etc - 2010. 7. 8. 13:19

그는 1890년 미국 인디에나 주에서 2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생길이 시작된 건 6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였다.

 

이때부터 그는 어머니가 일하러 가면 홀로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7세가 되자 소년은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고, 10세에 농장에 취직해

 

고된 노동을 했다. 그리고 12세때 어머니마져 재혼해 버리자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청년이 되어서는 직업군인으로 쿠바를 다녀왔고,

 

제대뒤에는 철도 노동자의 보험설계사, 주유소 점원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가난했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얻었다.

 

그러나 대공항의 격랑은 그에게도 어김없이 닥쳐왔다.  그는 나이 40에 또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제 믿을수 있는 것은 어려서 배운 요리뿐이었다.

 

그는 주유소 한귀퉁이에서 배고픈 여행자들에게 음식을 팔았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여섯개로 시작한 이 카페는 나날이 입소문을 타고 번창했다.

 

45세때에는 케터키 주지사로부터 '커넬'이라는 명예대령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카페에서 한푼 두푼 번돈으로 모텔을 지었다.  희망의 햇살이 비치는 듯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화재가 그의 레스토랑과 모텔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시작했다.  같은 자리에 더 큰 레스토랑을 지었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시작했다.  같은 자리에 더 큰 레스토랑을 지엇다.  하지만

 

곧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손님의 발길이 끊기자 헐값에 처분하고 말았다.

 

그는 실패를 거듭할때마다 또다시 일어섰지만, 남은 건 빚더미뿐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들을 읽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았다.  그렇게 그는 60세때 모든걸

 

잃고 극한상황에 빠져 정신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65세였다.  그는 나라에서 준 사회보장기금

 

105달러를 들고 마지막 희망의 길을 떠났다.  그는 중소 승용차에 요리기구를 싣고 전국을

 

 떠돌며 닭고기 조리법을 파러다녔다.  주머니가 비어 있는 날에는 남은 요리샘플을 뜯어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하루에 두세번씩, 2년동안 1009번의 퇴짜를 맞으며 문전박대를

 

당한끝에 마침내 옛 친구가 운용하는 레스토랑과 치킨 한 조각에 4센트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치킨은 대성공을 거뒀고, 그의 프랜차이즈 업체는 무섭게

 

퍼져나가 현재 80개국 1만 3000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 훌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할때마다 그 경험에서 배우고,  다음번에 더 잘할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65세의 노인, 커넬 샌더스에게 남은 것이라곤 중고 포드 승용차와 가게를 처분하고 

남은 단돈 105불, 그리고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11가지 허브 비밀양념을 이용해서 

만든 후라이드 치킨 조리법이 전부 였다. 


며칠 고민한 끝에, 그는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오리지날 래서피 후라이드치킨을 다 

른 식당에서 메뉴로 추가해 준다면 그 제조 방법을 가르쳐주고 치킨 한조각당 몇센트 

씩 로열티를 받아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남들은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커넬 샌더스는 중고차에 허브와 스파이스 그리고 압 

력솥을 싣고 미국 전국의 레스토랑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쉬울 리가 없었다. 

더욱이 당시는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매일 차 안에서 잠을 지새우며. 홍보용으로 만든 후라이드 치킨 밖에 먹을 수 없는 힘 

든 나날이었다. 커넬의 손을 처음 잡아 준 사람은 옛 친구 피터 허먼이었다. 

커넬의 치키을 맛본 피터는 평범해 보이던 커넬의 치킨에 매료되었다. 

피터는 치킨 한 피스당 4센트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커넬과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Kentuky Fried chicken)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미국 남부의 손님을 대접하려는 마음의 이미지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이렇게 최초의 KFC가 탄생했다. 레스토랑 사업 경험이 풍부했던 피터 허먼은 이 

후 미국 각 지역에 200점포가 넘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게 되어, KFC 최대 프랜차이즈 

사업가로 변신한다. 이후에도 커넬은 꾸준히 승용차 방문 영업을 통해 프랜차이즈점 

을 폭발적으로 늘려갔다. 하지만 청결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었다. 

자신의 요리를 제공하는데 어울릴 만한 청결한 식당 외에는 절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지 않았다. 청결을 상징하는 커넬의 흰색 양복과 나비 넥타이, 지팡이 차림도 이 무 

렵부터 시작되었다. 1964년 1월 75세의 커넬은 KFC를 존 브라운 주니어와 잭 머시에 

게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커넬은 KFC의 심볼로서 이후에도 지칠 

줄 모르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흰색양복과 흰 수염, 너그러운 미소는 KFC의 청결 

과 친절을 나타내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상징이 되었다. 1980년 12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커넬은 유니폼을 차려입고 미국내 KFC프랜차이즈점을 돌며 교육하 

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의 레스토랑 KFC는 현재 세계 약 80여국 1만 3,300점이 

넘는 매장을 구축하는 유례없는 레스토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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